클라우스 감상

삽화작업을 하면서 계속 보아온 감상을 글로도 정리해봅니다.

쓰다보니 많이 길어져서 줄여놓았습니다 :)
스포일러 주의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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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학원 이야기

작가명 : 카이첼

작품명 : 클라우스학원

★★★(별 다섯 개 만점)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이하 클라우스)는 제목 그대로 학원을 배경으로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합니다. 거기에 판타지 세계관이 가미된 판타지 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클라우스를 읽어가면서 이 소설이 학원물이라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습니다.

판타지가 가미되었다고 해서 ‘학원’이라는 공간의 의미가 퇴색되거나 변질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핵심은 변하지 않지요. 한창 팔팔한 나이대의 틴에이저들을 바글바글 모아놓고 장시간 붙잡아 교육하는 체제는 그 속성상 이야기의 보고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역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연령대라면 이미 다른 가공이 필요 없이 그들 스스로가 각종 소란과 파국을 만들어내는 소악마와 같아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에 적절합니다. 그보다 나이를 좀 더 먹으면 섬세하고 첨예해진 감성이 학원을 비롯한 억압적인 환경과 충돌하고, 또 한데 모여 있는 또래들 사이에서 자신과 주변의 관계를 정립하는데 애를 먹기도 합니다. 어쩔 때는 이 과정이 틴에이져들만의 사회 속에 거의 무정부적인 혼란을 수반하기도 하지요. 그 외의 요소들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이미 많은 갈등의 재료들이 있습니다.

그런 요소들이 학원물로서의 재미를 좌우한다고 하면, 클라우스의 포지션은 꽤 애매합니다. 일단 클라우스의 주역들은 나이만 고등학생 정도일 뿐, 폭발적인 감수성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일촉즉발의 틴에이저들이 아닙니다. 주인공 데일은 쟁쟁한 동료들에 비해 소박한 교양을 지니고 있지만,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미 완결적인 인물입니다. 불안하게 흔들리면서 성장할 여지가 한참 남은 인물과는 거리가 멀지요. 다른 주역들도 또래의 ‘보통 사람’과는 확연히 구분이 됩니다.

그리고 클라우스가 학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하기도 애매한 것이,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전부 클라우스 학원 바깥에서 진행되고 마무리됩니다. 본격적인 학원물을 쓰겠다는 구상이 있었다기보단, 겉보기 형식만을 취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클라우스는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을 풍부하게 끌어다 놓습니다. 클라우스는 남자주인공이 멋진 여성들 사이에 끼인 연애담이기도 하고, 가벼운 활극이며, 요소마다 유머도 끼어있습니다. 거기에 강대한 적과 벌이는 격전과, 철학적인 사색도 포함되어있지요. 수많은 재료들이 들어가 있는 꽤 규모 있는 요리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이 과연 재료들만큼의 맛을 내고 있을까요?

클라우스의 도입부에 들어선 직후부터 독자는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처음에는 주인공 데일 옆에 붙어있는 알렉 폰 볼드윈이란 캐릭터의 아우라 때문이죠. 그가 뿜어내는 개성은 이 작품의 첫 인상을 현학적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그는 천재에 절세 미남자이며, 배경 또한 대단히 막강한 ‘엄친아’입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좀 더 진행되면 그런 녀석과 대등하게 철학적 신선놀음을 수행할 캐릭터들은 주연과 악역사이에서 몇 명 더 등장합니다.

그들이 근대 철학의 저변을 짚어 올라가 공리, 실존과 자유라는 화두를 끄집어 낼 때에, 많은 독자들은 갈림길에 놓일 겁니다. 완독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혼란스러운 정보의 유입을 차단하고 이야기의 흐름에만 집중할 것인가에서 말이죠.

후자를 선택한 독자들이 ‘현학적인 수다를 즐기는 캐릭터 설정’을 필터로 떼어놓고 보면, 클라우스의 이야기는 기교를 모르는 우직함을 보입니다. 2년간의 학원 생활을 다루면서 많은 사건들이 펼쳐지지만 비밀들은 거의 읽는 이들에게 공개되어 있고, 스릴이나 불안을 비대하게 조성할 음모도 약합니다. 정보를 공개하는 타이밍을 조절하여 효과를 볼 수 있는 설정들은 거대한 흐름에 봉사하여 통렬한 결정타를 날리는 대신, 소소한 부분을 다듬는 잽에 가깝습니다.

알토스의 정체가 다른 인물들에게 밝혀지는 부분은 설정의 잠재력에 비해 너무 조용하게 넘어간 부분이 특히 그렇습니다. 더 골치 아픈(극적인 의미에선 더 긍정적인) 사태를 만들 열쇠가 하나 사라진 셈입니다.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고 확대시킬 잠재력 있는 설정들이 묻히다 보니 절정부가 약해지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부르크하르트, 샌드버그와 마지막으로 대결하는 부분은 아예 안티클라이막스로 느껴질 정도죠. 이야기의 테마를 사실상 마무리 짓는 부분이지만, 그 비중은 그때까지 있었던 다른 사건들의 거의 동일합니다.

전체를 주제하는 커다란 문제가 부족하고, 그에 따라 주인공인 데일의 반응이 미약하다 보니 전체 구성의 일관성이 조금씩 삐걱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겁니다. 특히 저처럼 연재물을 한꺼번에 몰아서 보았다면 그런 느낌을 더욱 크게 받을 수 있겠죠.

한 발짝 떨어져서 다시 살펴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합니다. 몇몇 캐릭터들이 펼치는 현학적인 입씨름과 사색은 이야기의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지나치게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습니다. 그건 활동을 보조할 수는 있어도 이를 온전히 대신하기엔 부족합니다. 캐릭터들이 저마다의 생각을 펼치는 것을 듣는 것도 클라우스의 재미지만, 캐릭터들이 사건을 맞이하여 보여주는 활동과 결정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행동이 아닌 말과 사색을 통해 중심 갈등을 전개해 나가는 것은 대단히 안이한 선택입니다. 말은 가벼우며, 그 내용이 언제나 의도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 속에 완벽한 논리를 구축한들, 전제가 불투명하다면 그것이 진실한 팩트를 나타낸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단순히 그 말이 훌륭한 구조를 지녔다는 의미일 뿐이죠. 진실하게 사태에 영향을 주고 주제의식을 분명히 하며 독자에게 흥미로운 체험을 주는 것은 인물들의 직접적인 활동과 선택입니다. 말이 그것의 전부가 된다면 이야기와 체험의 진실성은 한없이 얄팍해집니다.

말싸움은 극의 발전과 독자의 체험에 도움을 주기보단, 플라톤의 다이얼로그처럼 기나긴 토론에 빠지기 쉽습니다. 게다가 만약 클라우스가 다이얼로그라면 주인공 데일의 입지는 굉장히 위태로워집니다. 그는 주연급들 가운데서 가장 소박한 교양을 가진 지적 일반인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에게도... 아니 주인공이기 때문에 더더욱 할 일이 확실히 주어져야지요. 하지만 다이얼로그가 길어지면서 클라우스는 자주 주인공과 주연의 위상이 역전됩니다.

장르 바닥에서 흔히 퍼진 통념과 달리, 독자들의 캐릭터에 대한 감정이입은 온전히 캐릭터의 성별이나 능력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화학작용이 아닙니다. 감정이입의 성패는 온전히 타인의 마음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거든요. 하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인물이 흥미로운 사건에 맞서는 상황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주인공이 흥미로운 인물이 되기 위해서 그는 분명히 어떤 의지를 가지고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설령 그 의지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일지라도 말입니다.

느슨하고 진짜 활동이 경시되는 구성 속에서, 몇몇 캐릭터들은 큰 손해를 봤습니다. 특별한 무기 없이 사각관계의 구석에 몰린 리리가 그렇고, 연애담의 중심인 데일이 그렇습니다. 리리의 존재감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확연히 옅어지는 것이 보입니다. 데일은 연애부분에선 역시 아예 주인공이 아닙니다. 실제로 전전긍긍 갈등하며 장애물에 대응하는 ‘주인공의 역할’은 알토스가 전담하고 있지요.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알토스의 행보를 가장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습니다. 유의미한 흔들림이 거의 없는 데일은 이 부분에서는 완전히 주인공의 입장을 벗어나 하나의 객체로 취급받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장 극심하게 피해를 본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만약 클라크 샌드버그의 포지션이 더욱 뚜렷하게 잡혀있다면 클라우스는 많은 부분에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겁니다. 구체제 찌꺼기의 전형으로 그려지는 샌드버그는 사실 특정한 계층을 대표하는 위치인 것도 아닙니다. 공개되어 있는 이야기만으로 보면 그가 독자의 짜증을 유발하는 인격파탄 찌질이인 이유는 귀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개인의 인성 문제입니다.

그러나 클라우스와 같은 주제를 다룰 때에 샌드버그의 위치인 캐릭터는 더 존중받고 제대로 사용될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큰 악역인 부르크하르트도 샌드버그보단 좀 낫지만 마찬가지고요. 기존의 사상이 지닌 의미와 당위가 무너진 가운데 그 위에 개인의 실존을 세우려는 노력은 좀 더 깊이 다루어져도 됩니다. 주인공의 노력에 대항하는 자들이 공감할 여지도 없고, 동정을 베풀 가치도 느끼기 힘들도록 지질맞게 군다면, 심지가 한결 같은 주인공은 그들과의 만남으로 변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진지한 성찰이 아닌 작가가 말하고픈 주제에 대한 얇은 프로파간다가 됩니다.

샌드버그에게 깊이를 주어 더 모호하고 입체적이며 공감가는 인물, 한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로 조명하여 주인공의 대척점으로 당당히 세우는 것은 더 복잡한 차원의 흥미로운 갈등 구도를 만드는데 공헌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는 재미는 물론 주제의식과 이야기 구성의 진정한 일관성을 보완하는데 도움은 되겠죠.

클라우스에서 구사되는 현학적인 문장은 하나의 스타일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그것이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거든요. 세상에 나쁜 스타일이라고 감히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대중적인지, 작가가 스타일을 얼마나 완성도 있게 소화하는지 여부나 답할 수 있을 정도죠. 그러니 ‘왜 클라우스에 독자들이 많이 접근하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스타일과 연관지어 말할 수 있겠지만. ‘왜 중도하차하는가?’에 대해서는 마냥 스타일의 문제로 전가할 수는 없을 겁니다. (2009/3/19)

by 가일 | 2009/03/19 10:08 | 일지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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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카이첼 at 2009/03/19 17:23
오오. 정성들인 감상에 감탄.
그러나 작가로서 몇 가지 동의할 수 없는 해석과 평가가 있기에 지적해 봅니다.

1.데일은 완결된 캐릭터가 아닙니다.
글 전체에 걸쳐 데일의 알렉에 대한 열등감의 극복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그가 이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내었기 때문에 데일은 부르크하르트에 대해 대답을 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데일이라는 캐릭터가 자신에 대한 '계급'적인 입장을 깨끗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긍정해내는 작업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2.샌드버그라는 캐릭터.
샌드버그는 초기부터 어떠한 가치도 담당하지 않은 악역이 되길 기대하고 기획했던 것이며, 안티 프로타고스트로서 사상적인 깊이와 동기를 가진 캐릭터라는 입장은 알렉과 부르크하르트가 담당했기 때문에 그에게 특별한 주축을 담당시킬 필요는 없었습니다. 도리어 저러한 종류의 도덕적 악 자체가 물적 기반의 문제와 결합해 '존재한다' 것을 드러내는 것에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귀족적인 전형성을 대표한 캐릭터가 이 글에 끼어들면 근대라는 문제의식과 어긋나서 도리어 작품의 통일성을 해치게 됩니다. 작품에서 중요한 귀족들은 강략한 자본가가 됨으로써만 갈아남고 귄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임을 생각해 보세요.
3.행위와 언술의 분리.
주제 자체가 중요한 논리적 논쟁을 거쳐야만 성면하게 이해될 수 있는 문제의식이기 때문에 캐릭터들의 언술은 정교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것이 행위와 떨어져 있었던 경우는 없었다고 여깁니다. 가령 마지막 에피소드는그때까지 이루어졌던 자유-인식 사이의 문제를 세나라는 캐릭터가 인식을 지배함으로써 자유를 지배하는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지난 에피소드 데일의 대답에 대한 반성을 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에피소드가 인식론적인 반전을 구사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러한 반전은 당신이 옳다고 믿은 것은 정말로 옳은가를 환기하도록 합니다.
4.언술의 중요성
이 글에서 각 언술은 문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항상 중요했지만 그 해결은 언제나 논리나 언술이 아니었기 때문에 도리어 말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장면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은 알렉이 보첵 텍스트라는 것을 통해 발언하는 장면이고, 그 외에도 언술을 통한 논리적 정답을 구사하는 캐릭터로 드러난 알렉이란 캐릭터가 그 한계에 대해 여러번 발언하고, 결국 그 자신이 부르크하르트와 거의 다르지 않은 입장에 있었다는 것, 때문에 그는 데일에 의해 구원받아야 했다는 점을 생각하시면 명확하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도. 리리의 캐릭터가 충분히 부각되지 못한 것은 제 주의와 사랑이 부족한 탓이 맞습니다.
엉엉;
Commented by 가일 at 2009/03/20 16:42
적절한 피드백에 감사드리며, 저도 조심스레 답변해보겠습니다 :)

1. 카이첼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설정에 반해, 제가 데일을 완결적인 인물이라고 느낀 것은 클라우스의 전체 스토리 구성 때문에 두드러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클라우스 전체에서 데일은 일반적인 주인공의 역할에서 벗어나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말을 통해 진행되는 문제제기는 클라우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가지고 이어지지만, 독자에겐 데일이 클라우스라는 작품 전체에 걸쳐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쉽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지를 갖고 추진해나갈 목표점이 흐릿하다보니, 그가 마주한 장애물과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갈등, 그 극복이 미약하게 다가옵니다. 데일이 알렉에게 품은 열등감이라는 문제는 처음부터 극의 중심 갈등을 제공하는 대신, 외면화 되지 않은 채 쭉 잠복해 있다가 중반 이후에 이르러서야, 가면 축제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고요. 따라서 독자에겐 데일은 처음부터 줄곧 곧은 인물이었고, 가면 축제의 사건은 상궤를 벗어난 경우이며, 부르크하르트에게 마지막으로 내놓는 대답은 스토리가 발전되어온 결과이기 보단, 데일이 본래 지니고 있는 속성에 더 크게 기인하는 것이라 느끼기 쉽습니다.
게다가 부르크하르트와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데일은 거의 주인공이 아닌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기능적 인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에서 알렉은 완전히 프로타고니스트로서 안타고니스트인 부르크하르트와 대치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물론 최종해결을 그 장면의 조력자로서 기능하는 데일이 가로채버리면서 그 구도마저 흐지부지됩니다.
이 문제가 두드러지게 커진 다른 이유로는, 말을 통해 진행되는 중심담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일관성을 가진데 반해, 실질적인 스토리의 구조는 제 각각의 갈등과 해결점을 가진 분절된 에피소드가 있을 뿐, 처음부터 끝까지 계승되는 활동과 스토리의 발전이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을 겁니다.
처음부터 전체 주제에 연관된 문제를 뚜렷하게 외면화 시키고, 더 간략하고 집중적인 이야기가 구성됐다면 카이첼님의 본래 의도가 훨씬 와 닿을 수 있게 융화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2.아무런 가치도 담당하지 않는 악역이라면 그의 존재는 스토리의 군더더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적 기반과 결합한 도덕적 악의 존재가 주제의식과 연관되어 등장해야할 당위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그와 연관되어 스토리 발전에 영향을 끼치고 그에 걸맞는 방식의 결말을 맞아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사회적인 계층을 말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러한 악의 존재가 주제가 다루는 문제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샌드버그의 적절한 포지션이 되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클라우스에서 그의 그런 역할은 대단히 미미하게 보이고(부르크하르트에게 먹힌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성질은 스토리상의 사족이 되지요.

3&4. 행위와 언술의 분리나 언술의 중요성에 대한 문제가 떠오른 것은, 1에서 언급된 문제와 연결됩니다. 언술과 일치될 주인공의 활동이 있어야 하지만, 클라우스의 전체 구성에서 데일이 느끼는 문제의식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활동은 대단히 미약하게 느껴집니다. 즉 언술과 합쳐질 활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인물의 활동과 말로 진행되는 문제가 밀접하게 일치되었다고 보기 위해선 클라우스의 주인공을 알렉으로 바꿔놓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렉은 카이첼님의 의도에 의해 역시 완전한 주인공으로서 기능하지는 못하지요. 하지만 알렉이라는 캐릭터가 안타고니스트의 포지션에 있다는 사실이 클라우스를 보는 이에게 아주 쉽게 잊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주인공이 해야할 고민과 활동을 자꾸 빼앗아 버리니까요. 가면축제 이전까지 데일이 본격적으로 주인공으로서 바람직한 포지션을 보여줄 때는 대체로 몸으로 때워야 하는(......)상황에 부딪힌 경우입니다.

5. 지못미 리리 ㅠㅠ OTL

6. 삽화는 이번주 일요일 오후까지 작업을 끝내 보여드리겠습니다 :)
Commented by 카이첼 at 2009/03/21 12:07
후훗. 그림 기대하겠습니다~
그런데 네이트온은 안 하십?

그러면 아래는 답변.

1.데일이 부르크하르트와 대화해 그를 설득하는 장면은 그제까지 중 데일이라는 캐릭터의 정체성과 역할이 가장 빛났던 부분이라 여기기 때문에 알렉에 의해 위치를 빼앗겼다는 해석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가령 그 부분에서 데일은 과거 알토스에게 이야기 했던 자신의 신념, 칸트적 의미의 '숭고'를 도덕적인 해석으로 이어나가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작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이 약하게 느껴졌다는 가일님의 느낌 자체는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때 데일의 행위와 대사의 의미가 작중 가지는 무게는 정말 큰 것입니다. 알렉이야 말로 여기서 완전히 조역이 됩니다. 거기서 그는 말과 논리의 무력을 절대적으로 보여주며, 사태의 해결은 전적으로 데일에게만 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전혀 어떤 능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데일이 없었다면' 이라고 질문의 방식을 바꾸면 데일의 크게와 역할을 좀 더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2.시나리오 상의 연결 또한 고려된 결과물이기도 했습니다. 가면에서 '자아'라는 '주체'가 부정되고, 교회에 대한 이야기에서 '신앙(신앙)'이라는 공리가 근대적 자본주의가 도입되어 파편화, 파괴되는 모습을 보였고, 학술제때 '논리'라는 근대적 신념 자체를 일상언어에 대한 부정으로 파괴합니다. 여기서 학술제가 무대가 된 것은 물론 그것이 '과학'이라는 세계관에 대한 상징적인 무대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언어(진리), 신, 자아. 근대철학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저것들이 근대까지의 세계에 가지는 의미를 아실 것입니다. 이들 근대, 혹은 근대 이전의 세계관이 담보하는 말과 논리라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작품은 하나하나 부정하고, 가장 중요한 전제들이 부정된 위에서 부르크하르크와 알렉의 문제가 절정을 맞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들 작업 없이 데일의 말은 그저 말일 뿐이겠지만 저들 작업이 이루어진 이후이기 때문에 데일의 말은 정말로 대단한 의미를 가진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각각의 에피소드는 분리해서 즐길 수 있겠지만, 그 분리되어 즐길 수 있다는 것이 그것들의 연결을 부정하는 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3.샌드버그가 아무런 가치도 담보하지 못하는 악이 되어야 하는 것은 작을 위해서도 꽤 중요합니다. 알렉이라는 캐릭터가 담비하는 새로운 세계관은 물론 일종의 실존적인, 그리고 생철학적인 문제인데. 그런 세계관은 '논리'의 무력함을 전제하며, 그런 논리가 무력한 곳에서 가장 곤혹스런 고민으로 떠오르는 것은 결국 '악'의 문제입니다. 논리가 무력한 악, 설득할 수 없는 악, 이유 없이 의지만으로 악한 '악'의 존재는 상정될 필요가 있고 그 역할을 담당햇던 것이 샌드버그입니다.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의 첫 문장은 그런 것들을 예견하기 위해 쓰여졌던 것입니다.

4.데일에게 말에 붙어있는 행위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생각해 보시면 분명하게 전제되어 있음을 아실 수 있습니다. 데일은 자신의 '계급'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는 캐릭터이며, 그는 그 계급의 문제 때문에 바로 '학원'에 있는 것입니다. 세계관 자체가 데일이라는 캐릭터를 증명하고 있으며, 사소한 사건들이 프롤레타리아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동시에 그런 정체성 위에서 상승하고자 하는 욕구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작품 중 매우 분명하게 증명되어 있는 바입니다. 그가 학원에 다닌다는 것,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 이런 작품의 세계관 자체가 데일의 말을 전제하고 있는 행위 그 자체라 할 것입니다. 데일은 작품 중 가장 '시대의 자식'에 적합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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